희,로,애,락

배려

촌 님 2019. 4. 16. 08:52

 

 배려 참 좋은 단어이며 늘 행해도 부족함이 없는것

하지만 지나치게 배려하면 바보처럼 되고 오지랍이 되는세상

배려가 익숙해져있는 내게 남보듯하고 모른척해도 된다고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타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안타까움을 그냥 못넘기는 습관도 한몫


그래서 그런지 내가 가게 하면서 거의 안나가는데 한팔없는 후배네랑 할머니들 께서 구입하시고 도움을 요청하며 그런데는 갈수밖에 없다

왜! 안나가냐 하면 그런걸로 수입을 해야 하는 직종 위생 설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내게 와서 물건을 사서 설치하고 해야하는데 내가 다니며 돈을 벌거나 해드리게 되면 당연히 안되는게 맞다


그래서 그렇케 실천하는게 습관이 돼 버렸다

어디 모임을 가든 설거지 도맡아 하고 차리고 준비하는것도 주로 내가 스스로 하게 되는데 내 나이 이제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어도 되련만 그또한 익숙치가 않코 편하지가 못해서다

어떻케 보면 배려라기보다 과잉친절이라고 할수도 있고 그렇케 보일수도 있겠지만 난 습관화 돼버린지 오래됐기때문에 그게 더 편하고 익숙하다

내가 좀 수고해서 남들이 편하면 그런게 좋타


집에서도 마찬가지 아내가 반찬이나 무슨 일을 할때 내가 곁에서 조력을 해야만 편하다고 한다

말 안해도 눈치만 봐도 뭘 얼만큼 넣어야 하는지 알게된건 오래 익숙해진 보조덕분이다

한창 출장음식 전문으로 많이 할때 그때를 생각하면 이건 정말 사람이 도저히 할일이 아니고 할수도 없고 하지만 그걸 우린 해냈고 이뤘다

매주 주말에 금토일은 하루 두세시간 자면 많이 잘정도로 일 했다


그래도 다툼 한번 없이 눈치만 봐도 뭘해야 하는지 알기때문에 서슴없이 혜쳐나갔다

내가 먹는다 내가족이 먹는다 라고 생각했기에 대충하는건 없었고 약식도  꼭 내가 시루에다가 했고 갈비찜도 미리 피빼서 새벽에 작은 후라이 팬에 맛나게 찜을 하고 했는데 가스 서너개 설치하고 혼자몸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작업을 했었다

남자지만 그때는 피자팬 두개씩 돌리며 전도 부치고 칼질도 엄청 잘했었다


내가 새벽에 혼자 하다보면 아내는 여자이기에 화장좀 하고 고객을 맞이해야 하므로 아내가 할꺼는 화장후 내려와서 마무리 하고  점검 차원에서 하곤 했다

그리고 많이 나갔던건 아마도 하루 5~6군데 였던것 같다

그때 당시는 출장음식이 대세였으니까


나는 회갑 1곳 맡아가지고 가서 하고 아내는 4~5군데 돌아다니며 업무를 봐야 했었다

그러다 겨울에 사고도 났었지만 크게 다치진 않아 몇군데 업무를 마칠수 있었다 

늘 혹시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만약에 차가 미끄러지거든 25도 각도로 휀다로 밀고 나가며 정지하라고 이야기 했더니 겨울에 1차선에서 미끄러졌는데 그생각이 번뜩 떠오르기에 그대로 실천에 옮겨 진짜 큰 사고를 면할수있었다 만약에 그냥 놀라서 우측으로 틀었으면 2차선에 달려오는 차한테 받치켰을테고 너무 각도가 강하게 꺽였으면 뚝방으로 튕겨져 나갔을텐데 다행이도 그대로 들어맞아 그날 작업도 마무리 하고 사람은 안다치고 다행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뭐든지 세심하게 자꾸 반복적으로 이야기 해줬던게 떠오른다

차야 기게이고 고치며면 되지만 사람만 안다치면 된다는게 내 지론이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은  내가 운전교육 시켜서 면허증 따게 해주었고 아내도 내가 따게 해주었지만 안싸웠다 ㅎㅎ

면허 연수중에 안싸운사람 없다지만 난 안싸웠다


작은딸이 형부랑 운전 연수하다가 싸우고  난 안할래 하는걸 내가 시켜서 마주 땄다 ㅎㅎ

애들이 부르면 달려가고 한번도 마다 한적이 없으며 출장음식업 할때도 음식 다 만들어 지하실부터 모두 들어 출장나가는 차에 싣고 써빙들 태울 차량 배치하고 가서도 모두 들어올리고 했었는데 그때 많이 골았다 아마도 그 휴유증으로 지금 허리가 안좋아진것 같다

내가 들어나른게 지금도 타일가게 하며 무거운 물건을 들지만 그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젊었었기에 겁없이 들어날랐다


힘든시기를 버티고 난후라 정말 죽기 살기로 일했다

사람이 살면서 한두번의 기회는 꼭 찾아온다고했는데 그 기회가 지금이다 하고 둘이서 정말 열심히 죽기살기로 일했었다

그때 익숙해진 배려심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시키는일만 해서는 할수가 없었다

양념 넣는것은 아주머니들께 맞기질 않았다 그러면 양념을 아끼기 때문에 맛이 날수가 없다

모든 중요한건 우리가 다 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동기간이 부르거나 누가 도움을 청하면 달려가서 해주곤 했었다

심지어 앞집에 망나니같은 아들이 저지래 치면 그것까지 해결해 줘야 했었다

아빠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장애인인데 아들 삼형제가 번갈아 저지래를 치는데 정말 힘들었다

경찰서 검창청 법원 합의서 받으러 다니며 이것 저것 정말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어다


하지만 이제 모두 성장해 결혼을 하고 취업을 해서 잘 들 살고있는모습 보면 내 새끼는 아니지만 대견스럽다

소싯적에 그렇케 말썽을 피우더니 이제 자기 스스로 알아서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파트까지 장만해서 사는모습을  보면 정말 의젓하다

명절에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는 그러모습이 보기 좋타

내자식한테는 그런 속을 안썩었는데 남에자식때문에 무던히 속 썩었지만 장애인 엄마가 나를 찾는데 어쩔수가 없었다 탄원서 진정서 수도 없이 써봤다


오래전에 초대받아 갔더니 가족들과 교인들이 함께 모여 나를 초대해서 고기 파티를 하며 엣날 이야기 하면서 우는데 나도 눈물이 났다

자식도 아닌데 그때그렇케  너무 잘 해줘서 이렇케 잘들 성공해 살고 있으니 아저씨 덕분이라며 너무 너무 고맙다고 치사를 하며 엣날 이야기를 나눴다

오죽하면 술 못먹게 쇠창살을 방문에 해서 달았었으니 ㅎㅎ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정말 보람있었고 지금 다시 그런상황이라도 아마 또 그럴것 같다

남에 자식 우리집에 재워주며 도시락도 챙겨줬었고 정말 물심양면으로 지도하며 잘 대해줬었는데 군대 면회도 날보고 제일먼저 보고싶다고해서 내가 제일먼저 달려가고 했었는데 그친구 하나 실패 보았다


장가가서 아저씨처럼 살고싶다고 늘 그렇케 이야기하더니  내 친인척에게까지 보험사기 쳐서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부모도 이혼하고 형도 이혼하고 아마도 가정이 다 풍지 박살이 났는데 소식을들으니 어디 멀리가서 살고있단다

안타깝지만 다 잘되지는 않았다


남에게 배려하며 도움을 주는 삶 그삶이 나쁘지는 않타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아마 그렇케 살게 될것 같다

배려가 오지랍이 되어 부메랑이 될수도 있지만 그건  극히 일부일뿐이니까!


'희,로,애,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물(영덕 대게)  (0) 2019.04.18
불청 이 주는 의미  (0) 2019.04.17
지나온 세월   (0) 2019.04.13
발자취  (0) 2019.04.10
아이들의 꿈  (0) 2019.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