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

인생 이란!

촌 님 2022. 11. 8. 10:33

인생이란 자신과의 싸움 이라는 생각이 든다 . 내나이 69세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느끼는 생각이다. 살아오면서 남들과 치열하게 다투며 살아왔고 이겨내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돌이켜 보니 남들과 의 싸움이 아니고 내 자신과의 싸움이 더 치열했고 더 힘들었던게 아닌가 하는생각이 든다. 은퇴할 시간이 돌아오니 많은 생각들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정말 자신있게 말 할수 있는건 놀지 않았다는거다. 인생살이 우여곡절 가운데 한 3년 정말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때도 놀지 않코 막노동판에 뛰어 들어 삼년동안 막노동 으로 밑바닥 생활을 하며 내 자신과 의 싸움을 치열하게 했다. 힘듬 을 이겨내기 위하여 내몸을 혹사 시키는데서 더 희열을 느꼈던 시기가 아니였나 생각한다. 오래전이다 보니 가설재 밭침(일명 아시바) 가 낙엽송이었던때라 웃통을 벗고 일을하고 나면 저녁에 온몸에 낙엽송 가시가 박혀서 따가워 뽑지도 못하고 면도기로 밀었던 생각도 나고  참  이라고 간식 을 먹는데 그게 적응이 안돼 간식 을 먹으면 점심을 못 먹겠고 해서 나는 간식을 건너뛰고 점심을 먹었었다 막노동도 단련이 되어야 잘 적응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힘도 많이 들었고 거푸집 (당시 반네루) 도 크고 무거웠으며 콘크리트도 모래 자갈을 져다 부어 철판에서 물을부어 비비는데 그것도 너무 힘들었지만 잘 적응을 했었다  나는 모래가 푸기 쉬워 모래 지려고 남보다 일찍 나갔는데 남들은 자갈을 지려고 해서 나중에 물어보니 자갈이 더 가볍단다 모래는 입자가 고와 많이 들어가는데 자갈은 그렇치 않타는 것이다 ㅎㅎ그렇케 삼년을 견뎌내며 아이들 삼남매에 조부모 까지 모시며 정말 열심히 앞만 보며 살았다 

그때는 내 인생이 왜 이래 앞날도 없었고 그저 살기에만 급급해서 삶의 여유라곤 도저히 찾아볼수가 없었고 지금은 그 흔한 헐음한 차도 한대 없었다 12 5CC 혼다 오토바이 하나에 다섯식구가 타고 계곡으로 양평으로 홍천까지 놀러 다니며 그것도매우 즐거워 했었지요 아이들도 앨범 보다가 추억으로 이야기 나누며 그때도 매우 즐거웠다고 하더라구요 아이들 삼남매 학비 대기도 부족 했고 조무보 반찬 사다 해드리기도 힘든 시절이었는데 조부모 님 의 사랑의 힘이 컷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증손주 예뻐 하며 잔돈 500원짜리 바꿔 뒀다가 손주가 오면 불러서 500원짜리 손에 쥐어주면 그걸 또 누나랑 나눠 사먹곤 했지요 그렇케 성장 하다보니 자연히 예의를 갖추게 됐고 지금 잘 살아주고 있는것 같아요 늘 살면서 힘 들었어도 견뎌 낼수 있었던건 뭐니 뭐니 해도 아내의 내조가 아닌가 생각 합니다 막노동 할때 아내에게 힘든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현장에서 판네루 깔고 판네루로 만든 (도고방) 이라고 하는곳에서 자재틈에 끼어 자며 시멘트 포대 냄새를 맡곤 했었지만 힘들다고 느낄새도 없이 그저 일만 내게 주어진다면 하는 마음으로 살았었네요 일당을 주는데 너무 빨리 없어지는것 같아 일주일치씩 간주 봐 달라고 해서 나는 일주일 마다 받아다 아내에게 주곤 했는데 그래도 일주일치 를 받으니 조금 큰돈 처럼 느껴 지더라구요 

그러다가 렌즈공장 에 가서 공장장으로 일 하는데 거기도 직원들이 오버타임을 안 하려고 해서 나 혼자 철야에 휴일도 없이 열심히 일하며 버텼고 그것도 몇년 하다가 인근 농공단지에 구경 갔다가 선반이라는 기게가 있어 만지작 거리는데 누가 와서 왜 기게는 만지느냐고 하길래 내가 이 기게 전문 인데 호기심에 만져봤다고 했더니 마침 잘 됐다고 선반공 구하는 중이라고  우리 회사로 와 달라고 하는데  막상 가려니 렌즈공장도 사장이 나 보고 운영 하는데 떠나기도 그렇코 마음을 갈피를 못잡었다 하지만 내 후임자를 내가 구해 놓코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 할수 있는 기게를 드디어 잡으러 갔다 그때 그분이 전무 님 이었다 나이는 나랑 동갑이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일하며 직장장 공장장 까지 거치며 정말 열심히 일했고 회사도 분위기가 좋았으며 현장 직원들은 내가 다 모집 하고 가르켜서 어떤 일이든지 막힘없이 잘 해냈다 그리고 그때 좋은일이 한꺼번에 닥쳐 온다고 출장음식이 성행할때 아내가  출장음식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열심히 도왔다  너무 일이 많아지고 번창해서 한 12년동안 미친듯이 일을 하며 도왔다  그 즈음에 회사는 뇌물 이라는 덧에 걸려 문을 닫게 되고 나는 아내를 도와 적극적으로 일을 해서  어느정도 아쉬운 소리 안들을 정도는 됐다 

그러다가 출장음식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나는 타일가게를 운영하기 시작 했고 아내는 고생 많이 했으니 그만 쉬라고 했다 단독 주택을 헐어버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직접 건물을 지어 임대료를 받으며 지금은 그동안 열심히 고생한 덕분에 큰 부자는 아니어도 그저 생활할 정도는 된다 가게는 접어야 하지만 놀기도 싫치만 새벽에 일찍 가게 나오면 지인들이 찾아와 커피 마시고 담소나누는것도 좋쿠 이제는 나이가 있다 보니 지인들이 전부 동생들이라 내가 잘 하는 PC로 서류도 만들어 주고 이런 저런 잡다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게 좋아 계속 운영하고 있다 우리집에 세입자들 한테도 우리집에서 돈 많이 벌으시라고 5년 넘어 재 계약할때도 하나도 안올리고 그대로 있고 싶을때까지 계시라고 했더니 감동이라고  하시면서 고기 먹으며 못마시는 이슬이 까지 한잔 나누었다 음식 만들면 함께 나눠 먹고 정말 가족같이 지내는게  너무 좋타 

삶을 뒤돌아 보니 남들과 싸우지 않코 나와 열심히 싸우며 잘 살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잘 알지도 못하는 남들에게는 절대 이길수가 없다 자제 할줄도 알고 다스릴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많은 않은게 사실이다 언제나 어려울때 유혹의 손길이 뻗쳐도 그걸 이겨내고 알량한 재화 축내지 않았다 뭘 해보겠다고 하고 그랬으면 아마 알량한 재화마저 모두 낭비하고 더 어려웠을 텐데 그럴때마다 몸으로 때웠던게 지금에 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들에게도 늘 이야기 하지만 어떤 사업을 하려면 스스로 벌어서 종자돈 삼아 해 보거라 괜스례 집 담보 잡히고 대출 받아  그걸로 뭘 해보겠다고 하고 해서 집 날리고 여러사람 가슴아프고 고통스럽게 하는걸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부모 집까지 날린 내 친구들도 제법 있다 

아들에게도 제대후 용돈을 안주고 벌어서 쓰라고 했더니 용역에 나가 힘들게 일해 벌어서 썼던적이 있는데 오래는 아니었지만 그 생활이   살아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살면서 고생은 해 봐야 된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관대하게 정말 열심히 살아준 몸댕이 잘 관리 하며 건강하게만 살아보자 ~~그동안 훈장처럼 얻은 협착증 잘 관리하며 운동하며 그동안 잘 살아준 내 몸 내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며 항상 내곁에서 큰 힘이 돼준 아내에게 늘 고맙고 감사하며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제는 여행 자주 다니며 행복하게 삽시다 나중에 별이 되더라도 아쉽지 않케 참 잘 살았다고 말할수 있도록 !